[ESSAY] 학교 옆 편의점

매거진 2023.11.14


 

살면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순간마다, 가장 힘들었던 공부 아닌외로움이었다.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수험의 밤들. 깊고 지루했던 시간에 편의점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과 달콤한 초콜릿 조각은 유일한 나의 , ‘그래, 해보지 라는 긍정을 다지게 하는 주문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제 수능을 치렀던 나이의 곱절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부를 전혀 하지 못한 채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악몽을 꾸곤 한다. 평화롭게 앉아서 수다를 떨던 나에게 친구가 갑자기 말을 건다. “내일 수능인데 공부는 다 했어?” 그럼 나는 사색이 되어 답한다. “아니, 난 전혀 몰랐는데…” 그렇게 울먹이면서 시험장에 들어가 듣도 보도 못한 말들이 가득한 문제지를 대면한다. 뭐 대강은 이런 흐름의 꿈이 드문드문 나를 찾아와 당혹스럽게 한다.

 

그런 꿈을 꾼 날이면 잠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무언가 까먹은 듯한 찝찝함을 떨치기 힘들다. 어딘가 불안하고 긴장되는 감각이 살아난다. 아마, 수능 문제를 풀 수 있는 지식은 거의 사라졌어도 고등학교 3년 내내 마음을 짓누르던 무게와 부담감만은 내 몸 어딘가에서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수험생 시절을 떠올리면 불이 꺼진 교실이 연상된다. 실제로는 불을 켜고 공부했을 테지만… 이상하게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렇다. 어쩐지 어두침침한 교실, 낡은 복도, 축축한 냄새, 엉망으로 쌓여 있는 문제집들, 무표정한 표정들… 그런 장면들이 생각난다. 한 교실에 40여 명의 십대 소녀가 14시간 이상씩 모여 앉아 있던 그 때, 우리는 어떤 위급 상황을 함께 극복한다는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를 돌볼 여력은 없었다. 시험의 무게는 온전히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기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해맑은 응원의 말조차도 그 무게를 더할 뿐일 때도 많았다.

 

대부분이 갑자기 불어난 살로 교복이 작아져 있어서 주로 체육복을 입고 생활했는데, 명찰의 각도 하나에까지 엄격하던 학생주임 선생님도 교복을 어디에 뒀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았었다. 수험생이라는 이유 하나가 모든 설명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무소불위의 영역에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는 진공상태, 표류의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버텨냈다. 마치 수도승처럼 먹고 자고 공부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욕구도 허락하지 않았던 속에서도 각자의 길티 플레저 혹은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 같은 것을 하나쯤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앞머리를 동그랗게 마는 일에, 누군가는 일일 드라마를 몰래 보는 일에, 누군가는 남자친구와의 짧은 통화에서 위안을 얻었는데 나의 경우는 학교 앞 편의점에서 매일 다른 맛의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것이 그랬다.

 

  

새로운 경험 앞에서 겁이 나고 작아질 때마다 닮은 꼴의 편의점의 풍경은 어쩐지 최후의 내편과 함께 있는 듯한 안도감을 준다. 전국 곳곳에 어디를 가더라도 나를 위해 마련된 쉘터, 난 그 편의점에서 내 안의 스위치를 온(ON)으로 전환하며 세상에 나갈 준비 운동을 마친다.  

 

저녁 급식을 먹고 야간 자율 학습을 하기 전, 정문 옆의 편의점에 들러 오늘의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일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나만의 오락 시간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띄는 시간,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알록달록한 군것질 거리를 구경하는 5분 정도의 찰나가 긴 하루를 버티게 하는 조그마한 숨구멍이었다.

 

수능을 마치고 논술 시험을 보러 다닐 때는 언제나 근처 편의점에 들러 잠시 숨을 돌렸다. 이건 지금까지도 낯선 곳을 방문하면 이어지는 루틴이 되었는데, 처음 와 본 생경한 곳에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면 반드시 약속 시간보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먼저 도착해 근처 편의점을 들린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긴장된 상황 속에서 익숙한 편의점의 풍경은 어쩐지 안도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편의점 테이블 한 편에서 커피 한 잔에 초콜릿 한 조각을 먹으며 마음을 적응시키는 시간, 창문 너머로 찬찬히 주변 풍경을 둘러보기도 하고 바지런히 정리된 진열장을 찬찬히 뜯어보기도 한다. 새로운 경험 앞에서 겁이 나고 작아질 때마다 닮은 꼴의 편의점의 풍경은 어쩐지 최후의 내편과 함께 있는 듯한 안도감을 준다. 전국 곳곳에 어디를 가더라도 나를 위해 마련된 쉘터, 난 그 편의점에서 내 안의 스위치를 온(ON)으로 전환하며 세상에 나갈 준비 운동을 마친다. 

 


 

수능이 끝나고 그간 풀었던 문제집을 버리던 날, 내 인생에서 다신 이렇게 공부할 일 없겠지 싶었는데 삶은 끊임없이 시험에 들 일의 연속이었고, 취직 시험, 자격증 시험 같은 크고 작은 관문들은 수시로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반쯤의 자신감과 반쯤의 자괴감으로 혼란과 불안에 빠지곤 했는데… 괴물같이 버텨 선 시험 앞에 유일한 위로법은 편의점에 들러 새로운 군것질 거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편의점 커피 한잔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응원. 그 소소한 다독임으로 버거운 부담감을 덜어내고 용기를 내어 나에게 주어진 시험들을 치러내고 버텨냈다.

 

나는 요즘도 가끔 겁먹은 아이의 얼굴을 하고 편의점에 들어서곤 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젤리 한 봉지를 찾으며 잠시의 명상을 한 후에 다시 밖을 나선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곁에서 빛나던 나의 편의점,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고르며 ‘습습후후’ 숨을 고를 수 있는 피난처가 있어서 버틸 수 있던 날들이 있었다.

 

 

김희진 에세이스트

글팔이독거젊은이. 저서로 『회사 가기 싫은 날』, 『오늘밤은 잠이 오지 않아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