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플라스틱 여름밤... 그르르갉

매거진 2023.08.22


 

늘어난 티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어느 여름밤, 맥주 잡고서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면 나도 모르게 작은 숨이 터져 나올까. 더운 바람 부는 저녁 편의점 의자에 앉아 떠올린 오늘은, 뷔페에서 나눈 멋진 미래보다 가슴에 남나. 여름밤 편의점 플라스틱 테이블 위를 구르는 이야기는 그다지도 사소하고 꿈결같다. 잊을 없다.



북쪽에서 내려온 핏줄은 없지만 그저 만두를 사랑해서 ‘만두 왕’이 된 아빠. 그는 집에서 만두 만드는 일을 일종의 숙명처럼 지고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만두 왕의 가족은 만두 노동을 피할 수 없다. 설날에는 만둣국이 차례상에 올라가야 하니까 김장 김치를 듬뿍 넣은 김치만두를 만든다. 봄에는 새김치를 만들기 전 김장 김치를 처리해야 하니까 또 만두를 만든다. 겨울을 앞두고 김장하기 전, 김치를 넣을 공간을 마련해야 하니까 또 또 만두를 만든다. 그렇다면 여름은? 김치가 없다고 만두를 만들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우리에게는 애호박이 있다. 여름이면 넘쳐나는 애호박을 채 썬 후 살짝 절여 물기를 짜낸다. 그리고 다져서 볶은 고기, 수분을 없앤 두부와 각종 양념을 넣고 버무리면 만두소가 완성된다. 밀가루 반죽을 직접 밀어 만든 만두피에 만두소를 꽉 채워서 쪄내면 여름의 맛, 애호박 만두가 완성된다. 이건 여름마다 우리 집에서 반복되는 일이다.

 

한여름 집에서 만두를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미 시판 만두가 전문점 못지않은 퀄리티를 내지만, 천하의 어떤 만두도 ‘만두 왕‘에게 만점을 받는 일은 없다. 그러니 겨울이건 여름이건 만두를 만든다. 그래도 겨울은 만두를 만들기 수월한 편이다. 여름에 만두를 만드는 일은 일종의 수행이나 극한 체험에 가깝다. 여름에 만두를 만들 때는 사람보다 만두의 컨디션이 우선이다. 무더위 속에서 온종일 앉아서 만두를 만드느라 엉덩이에 땀이 차지만 만두피가 냉기와 바람에 마르지 않도록 선풍기나 에어컨을 강하게 틀 수도 없다. 그렇게 아침부터 시작한 만두 전쟁이 냉동실을 가득 채울 만큼 애호박 만두가 쌓이고 나서야 서서히 끝이 보인다. 분식집에서나 쓰는 4층 양은 찜기가 내뿜는 수증기 때문에 집안은 찜질방 못지않다. 만두 고행이 마무리되는 저녁 즈음에는 만두를 먹기는커녕 보기도 질린다. 설거지와 뒷정리를 대충 끝내고 오래 찜통에 들어앉아 퉁퉁 부은 만두 상태의 엄마를 데리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여름이라도 해가 떨어지면 공기부터 다르다. 만두 냄새도 없고, 정수리를 쪼갤 듯 내리쬐는 태양도 없다. 한결 선선한 바람이 분다. 종일 만두에 절여진 모녀의 목적지는 걸어서 5분 거리의 편의점이다. 점심으로 처음 찐 만두를 먹은 후 빈속이지만 냄새에 질려 배가 고프지도 않다. 만두를 만드는 내내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순간을 실행할 차례다. 일단 얼음 컵과 캔맥주, 그리고 짭조름한 새우 맛 과자 한 봉지를 계산한다. 그걸 품에 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된다. 편의점 밖 테이블에 앉아 얼음 컵을 열어 맥주를 콸콸 따른다. 얼음 사이로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탄산을 보니 눈이 다 시원해진다. 목구멍을 열어 차가운 맥주를 들이부었다. 이 모습을 본 엄마가 말했다. 

 

“우리 딸, 술꾼이었네~”

 

이게 다 만두 덕분이다. 엄마 앞에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술 먹는 모습을 보여 드린 게 그날이 처음이었다. 평소 가족 전체가 모이는 식사를 할 때 반주 한 잔을 하지만 입만 축이는 정도였다. 체질상 알코올이 한 방울만 들어가도 얼굴이 빨개지고, 몸 곳곳에 빨간 반점이 생긴다. 그러니 사회생활을 하며 잘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어두운 술집에서는 적당히 분위기를 맞춰 술을 먹었다. 반면 조명이 환하고 비교적 편한 가족 식사 자리에서 술을 먹을 때는 내 발톱을 숨겼다. 하지만 한여름의 극한의 만두 노동은 내 발톱을 숨길 한 줌의 에너지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차가운 맥주가 식도를 타고 장기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그 속도를 따라 차분히 술기운이 퍼졌다. 여름밤,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모녀의 수다가 이어졌다. 아빠는 왜 만두를 그토록 사랑하는가에 대한 각자의 추측부터 끝이 없는 만두 노동에 대한 불만, 집에서 만드는 만두와 사 먹는 만두의 합리성 등등 주로 애증의 만두에 대한 한탄과 불평이 이어졌다. 집에서는 겸연쩍어 하지 못했을 이야기가 편의점 테이블에서 가능했다. 눈치 주는 사람도 없고, 쫓기듯 해야 할 일도 없는 편안한 분위기. 여름밤 편의점 테이블에서 모녀가 느낀 평화로움은 온종일 시달린 만두 전쟁의 피로와 괴로움을 잊게 했다. 

 

알코올에 약한 유전자를 공유한 모녀 사이라 그럴까? 각자 맥주 한 캔을 다 비우지도 못하고, 몸과 마음이 갓 뽑은 떡처럼 따끈하고 말랑해졌다. 늘어진 몸을 의자에 널어놓고 불평불만을 쏟아 냈던 모녀의 입에서는 다음에 만들 만두에 대한 개선점과 보완점이 쏟아졌다. 그렇다. 우리는 뼛속까지 ‘만두 왕’의 아내와 딸이 확실하다. 만두 최면에 걸린 모녀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만두 냄새를 폴폴 풍기며 남은 맥주를 홀짝였다. 그리고 다음번에 만두를 더 잘 만들기 위해 반성과 다짐을 편의점 테이블 위에 쏟아 내고 있었다. 

 

부모님의 기력도 예전 같지 않고, 만두를 먹을 형제·자매도 하나 둘 집을 떠났다. 직접 만두를 만드는 일보다, 유명한 만두집에서 공수해 오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 집에서 만두 만드는 횟수도 양도 줄었다. 하지만 이날의 기억이 강렬해서일까? 여름이 되면 편의점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수년이 지났지만, 여름밤 편의점을 지날 때마다 종일 만두에 시달리고 얼음 맥주로 건배하던 순간이 머릿속에 자동 재생되기 때문이다. 만두처럼 후끈하고 또 맥주처럼 시원한 그날의 추억이 있어 여름밤, 편의점 앞을 지날 때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작가 호사

먹고 마시며 떠들다가 문득 음식이 건네는 메시지를 발견할 희열을 느끼는 사람. 사소한 일에 감동하기를 좋아한다. 10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음식에 담긴 마음과 음식을 먹으며 헤아리고 다짐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에세이 『먹는 마음』을 썼다. 이외 지은 책으로 『포스트잇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 『쓸데없어 보여도 쓸모 있어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