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물 뒤에 빼곡히 적힌 아름다운 글씨. 인쇄 아닌가 싶어 눈을 씻고 봐도 분명한 손글씨입니다. 이 유려한 서체의 주인공은 바로 CU강릉소금강삼거리점 최영식 점주님. 12월부터 2월은 비수기로 고객이 드물지만, 그래도 점주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점포 불을 켜는데요. 이 한적한 여유 안에서 차분히 글씨를 쓰기 위해서입니다. 장인을 닮아 시간이 흐를수록 정교해지는 글씨를 BGF LIVE에서 만나봅니다.
겨울이 되니 소금강으로 향하는 도로가 황량합니다. 간혹 차창 밖으로 쌩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차가 한 대씩 보이지만, 소금강을 목적지로 잡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눈이 녹고 강물이 힘차게 흐르는 봄이 되면 소금강은 숨겨 놓았던 자태를 눈부시게 보여주는데요. 그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 예로부터 선조들의 놀이터로 꼽혔습니다. 율곡 이이는 이곳을 일러 ‘작은 금강산’이라 부르기도 했죠. 바로 거기서 유래한 이름이 지금의 소금강(小金剛)이랍니다.
어느덧 도착한 소금강 인근. 물놀이 용품과 간단한 먹거리를 판매하는 작은 가게들은 여럿 보이지만 휴게소답게 각종 생필품을 구비한 장소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든든한 휴게소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CU강릉소금강삼거리점입니다. 올해 70세의 최영식 점주님은 고객이 드문 한겨울에도 새벽부터 나와 점포를 지킵니다. 아름다운 정경을 바라보면서 점포를 돌보다 보면 남는 시간도 생긴다고요. 그럴 때 점주님은 예의 붓을 드십니다. 우선 심호흡 한 번, 그리고 이내 붓끝에서 풀려나오는 부드럽고도 단호한 글씨. 고요한 가운데 고도의 집중을 더해 써 내려가는 글씨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 직접 들어봤습니다.
들어올 때 보니 뭔가 쓰고 계시더라고요.
소금강 앞에서 CU를 운영한 지도 벌써 6년이 넘었는데요. 관광지다 보니 겨울에는 고객이 적지요. 이럴 때는 상품 홍보 포스터 뒤에다 글씨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여름 관광 특화 지점이라 상대적으로 겨울인 12월부터 2월까지는 고객이 드물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일하는 데 있어 특별히 중요한 점이나 어려운 점이 있으신가요?
점포 운영하는 6년간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쉬는 시간에 자기계발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여기가 저한텐 놀이터니까요. 내 나이가 올해 일흔인데요. 나와서 이렇게 글씨도 쓰고, 가끔 고객 들어오면 맞이하고 그런 게 좋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겨울에 고객이 드물긴 해도 꼭 한번씩은 있죠. 당장 화장실이 급한 고객부터 목 말라 들어온 고객, 라면 한 끼 찾는 고객…. 제 발로 우리 점포를 찾는 고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CU 간판 보고 반가운 마음에 정차했는데 제대로 응대하지 못한다면 우리 점포에 대해 얼마나 아쉽게 생각하겠어요.
그래서인지 화장실과 휴게실 표시를 크게 해두셨어요.
이 근처에 화장실이 너무 열악해요. 보시다시피 여기가 너무 한적하고 딱히 공중화장실도 없으니 우리 점포가 휴게소 역할을 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 누구든 화장실이 급하면 오시라고 저렇게 써붙여 놨어요.
원래 자영업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맞아요. 우리 아내가 보리밥집을 20년 했고, 나도 다른 일 하면서 아내 돕느라고 장사를 오래 했어요. 아내가 나이 들면서 아들에게 식당을 물려주고 우리는 이 소금강 경치 좋은 곳으로 왔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 건물에 원래 있던 편의점 점주가 갑자기 나가게 됐죠. ‘내가 한 번 해볼까’ 싶어서 시작한 게 의외로 너무 재미가 있었어요. 보리밥집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주인이 해야 하는데, 편의점은 물건을 영업본부에서 가져다 주잖아요. 그게 편하기도 하고, 맛집으로 소문나지 않아도 간판을 보고 고객들이 하나 둘 들어와요. 그게 신기하고도 재미있고. 가만히 집에 있으면 만날 수 없는 동네 단골들하고 대화 나누는 것도 좋았어요.
상품 홍보 포스터가 이렇게 쓰일 줄 몰랐어요. 미끌미끌한 것이 글씨 쓰기 좋은 종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유, 버려지는 게 너무 아깝잖아요. 난 글씨를 2019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매일 쓰면서 연마하다 보니 조금씩 잘 쓰게 됐죠. 저기 저렇게 쌓인 게 다 내가 쓴 글씨인데, 노트만 해도 몇 백권 모였지요. 근데 편의점을 하고 보니 버려지는 종이가 참 많더라고요. 당시 SC한테 내가 “이거 우리 점포에 있는 거 말고도 다른 데서 버려지는 것도 받을 수 있냐” 물어봤어요. 이런 전단지는 행사 기간에만 붙이니까, 날짜가 지나고 나면 쓸모가 없잖아요. 우리 점포에서만 해도 매달 몇 장이 나오는데 이 근처 점포에서만 가져와도 내가 글씨 연습장으로 충분히 쓸 것 같더라고요. 일일이 칸을 만들어서 여태 글씨 쓰는 용도로 잘 쓰고 있어요.
한자도 있고, 한글도 보이네요. 주로 무엇을 쓰세요?
지금은 천자문을 쓰고 있어요. 우리 때에는 이걸 많이 필사했어요. 평소에는 사자성어도 많이 쓰고 그러죠. 좋은 뜻을 가진 글씨를 많이 쓰다 보니 주변 사찰 스님들도 하나 써달라고 부탁도 하시고, 고객들도 제사 지낼 때 지방 써달라 요청하기도 하고. 남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서 하기 시작했는데 많은 분들이 봐주시니까 고맙죠.
이렇게 주변에 글씨랑 펜, 만년필이 있는 걸 보면 고객들이 “그건 뭐예요?” 하고 물어요. 그걸 시작으로 사담도 나누고 친해지기도 하죠. 여기 이 잉크도 고객이 선물해 주신 거야.
이렇게 글씨 쓰는 점주님, 또 있을까요? 고객님들이 다들 놀라실 것 같은데.
내 개성이죠. (웃음) 이 모자랑 선글라스도 나만의 개성이고, 글씨도 마찬가지예요. 장사를 잘 하려면 이렇게 나만의 개성, 우리집만의 매력 같은 게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어떤 일을 하든지 그래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내 일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 강점을 가져야 해요.
이 글씨는 무슨 뜻인가요?
‘세월부대인’.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아요. 그러니까 시간을 아껴 쓰라는 거죠. 내가 이 글씨를 필사하기 시작한 것도 다 시간이 아까워서예요. 겨울에는 사람이 한 시간에 한 명도 들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럼 그 시간이 너무 아까운 거죠. 그때 유튜브 같은 걸 보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이렇게 글씨를 쓰는 거예요. 글씨를 쓰다 보면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까 마음이 평온해지고 잡생각이 사라져요. 자, 또 여기 쓴 건 내 좌우명이야. ‘자기의 허물을 보여주는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라’라는 뜻인데. 저는 여기 오는 모든 사람이 스승이라고 생각해요. 내 나이가 더 많아도 이 CU를 시작할 때 유통 같은 것 하나도 몰랐어요. 당시 SC가 나보다 한참 어린 분이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줬어요. 지금 SC인 최민혁 주임도 그렇지. 나에게는 다 스승이죠.
글씨 쓰실 때 점주님만의 원칙이 있으세요?
있죠. 이 네모 칸 정중앙에 반듯하게 써야 하는 것. 그 안에 정확하게. 글씨마다 획이 다르지만 글씨를 이 네모 정중앙에 위치시키려다 보면 바르게 쓸 수밖에 없어요. 멋있는 서체보다 중요한 것이 이렇게 기준을 항상 지키는 것이죠. 글씨 쓴 종이마다 저는 사인을 남겨 놔요. 여기 보이죠? 안경이랑 모자를 표시하는 건데, 이것도 저기 CU의 음mmm! 와인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여기 라벨 그림 보세요. 선만으로 사람 얼굴을 표현했잖아요. 나도 안경과 모자가 내 트레이드 마크라 이렇게 사인으로 표시했죠.
CU 가족들에게 올해의 덕담이 될 글씨 한 번 써주세요.
아, 이걸로 할게요. 아까도 얘기했던, 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요즘 얼마나 다들 힘들어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는 아무것도 시작하고 싶지 않고 힘이 쭉 빠지죠. 그럴 때일수록 저는 자기한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렇게 매일 글씨를 쓰는 것도 자기계발이에요. 제가 어디 학원이나 센터 가서 배운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이렇게 잘 썼겠어요? 아주 난리였죠. (웃음) 혼자 수양하면서 매일같이 쓰다 보니 실력도 늘었어요.
나는 글씨를 내가 좋아서 해요. 이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나만의 취미생활, 날 성장시켜주는 그런 활동을 하면 일흔이 넘어서도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어요. 높은 자리 하나씩 했던 내 친구들, 다 은퇴하고 지금 집에 있거나 운동을 다닌다고 해요. 일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근데 나는 이게 좋습니다. (웃음) 좋아서 이렇게 매일 출근해서 고객 맞이하고, 남는 시간에 글씨를 써요. 나이 들수록 시간이 더 아깝거든. 그러니까 올해 우리 점주님들 모두 ‘세월부대인’, 힘들 때일수록 포기하지 말고 자기를 깊이 들여다보고, 시간을 아껴 쓰면 좋겠어요.
인터뷰. 최영식 점주님(CU강릉소금강삼거리점)
글. 김송희
편집. 성지선
사진. 안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