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촬영지로 유명한 함양한옥마을. 전통과 현대가 멋스럽게 어우러진 이곳 초입의 삼거리에는 유명한 편의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림 그리는 점주님과 그림 그리는 스태프, 그리고 그림 그리는 자녀들까지. 예술인이 모이는 작은 살롱에 다녀왔습니다.
여기 CU 맞아?
“CU가 생긴다고?” 드라마 촬영지로 자주 꼽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양한옥마을이 위치한 경남 함양군은 조용한 동네입니다. 가끔 관광버스를 탄 관광객들을 제외하고는 마을 주민들이 소소하게 일상을 꾸려 나가는 작디작은 마을이죠. 그래서 CU가 생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주민들은 좋으면서도 살짝 의아하기도 했었답니다. 오픈한 뒤에는 물음표가 더욱 커졌고요. 그도 그럴 것이, 점포 앞에 멋들어진 담쟁이 넝쿨이며 아기자기 소품들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개성 강한 그 외관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도자기 작가로 활동하는 CU함양한옥마을점 이홍경 점주님은 물론 남편인 노종환 작가님도 회화에 투신하고 있는 데다, 두 분의 아들은 패션 디자인을, 딸은 미술을 각각 전공해 남다른 감각을 자랑하기 때문이죠. 심지어 스태프들도 미술과 친하다고 하니 이 정도면 CU함양한옥마을점은 함양 예술인들의 ‘살롱’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독특한 점포 풍경에 어리둥절하던 주민들도 어느새 그 개성에 스며들었고요. 이제 이곳은 과자도 사고, 예술의 흥취도 느끼는 명소로 이름났답니다.
CU를 중심으로 뭉친 함양 예술인들
취재팀이 방문한 11월 초 주말은 함양한옥마을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CU함양한옥마을점 뒤편에 위치한 동네 공터에서는 오후 1시부터 풍악(?)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요. 누구나 들러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달큰 시원한 막걸리와 맛 좋은 고기, 김장철 맞은 김치가 푸짐하게 준비되어 발길을 끌어당겼죠. 이처럼 온 동네가 떠들썩한 날, CU함양한옥마을점에도 특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점주님 부부, 스태프들, 자녀들. 그러니까 ‘CU’라는 이름으로 모인 예술인들이 그간의 작품을 뽐내는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평소에도 CU함양한옥마을 앞은 작은 전시터였습니다. 이홍경 점주님이 제작한 도자기를 한두 점 내놓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날은 본격적으로 점주님과 스태프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날이라 더욱 특별했습니다. ‘모두 미술을 사랑하는 만큼 작품 수도 많으니, 축제를 맞아 전시를 해보자’며 마음먹고 판을 벌인 것이죠.
“함양에 정착해서 살다 보니 친척들도, 지인들도 점포 일을 도와주러 자주 옵니다. 우연찮게도 그들을 비롯한 저희 주변이 온통 미술이나 공예를 하는 사람들이에요. (웃음) 바쁠 때에는 먼 시숙 어른도 점포를 지켜 주시는데 그분도 서예가이시고, 여기 같이 일하는 스태프 정윤희 씨도 베이커리를 운영하며 파리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친구죠. 이 분의 케이크와 쿠키에도 예술적인 감각이 녹아 있거든요. 주말마다 CU를 지켜주는 스태프이자 제 벗인 양연주 씨도 도자기 작가고요. 저희들 작품만 모아도 웬만한 전시회는 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예술가, 점주 되다
전시회 타이틀은 <과자 파는 사람들>. 점포 입구에는 소개글과 단체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서 일해준 사람들이 모두 예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이 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었어요. 총 9명이 참여했고, 10대부터 6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와 여러 장르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입니다. 깊어진 늦가을 <과자파는 사람들>과 함께 따뜻하고 감성 충만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홍경 점주님이 직접 작성한 소개글에서는 작품과 관람객에 대한 애정이 묻어납니다.
“남편과 제 고향이 함양이에요. 여기서 저는 미술강사로 오래 일했죠. 지금도 옆동네 초등학교에서 간간히 일하는 중이고요. 도자기를 만들면서 종종 전시도 하다 보니 이번 전시를 기획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어요.”
평생 미술강사로 일하던 점주님과 화가인 남편 노종환 작가가 편의점을 시작한 것은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이었습니다. 미술강사 일이 줄어들고 전시회도 계속 취소되면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시어머니께서 이 자리에서 슈퍼를 오래 하시다 그만두셨어요. 누가 장사를 할 만한 자리가 아니어서 5년간 비어 있었는데, ‘여기에 편의점을 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처음엔 BGF리테일 직원분들도 반신반의하셨어요.”
이홍경 점주님의 말처럼 CU함양한옥마을점이 위치한 인근은 시골길인 데다 동네 인구 수도 많지 않습니다. 오픈 이래 지금까지 CU함양한옥마을점 이외에는 인근 슈퍼도, 다른 편의점도 없죠. 하지만 이홍경 점주님은 ‘내 고향’이라는 점, 또 거창과 함양을 오가는 길목인 만큼 운전자들이 자주 들를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곳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다행히 CU한양한옥마을점은 오픈 초반 주변인들의 걱정을 불식시키며 4년을 넘어서는 지금도 성업 중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동네 사랑방
행사 상품이 많은 CU는 ‘남에게 퍼줄 때’가 가장 좋은 이홍경 점주님께 최적의 공간입니다. 가끔이지만 아이들이 방문할 때면 사탕 하나씩 꼭 쥐어 주고, 일손 바쁜 농번기에는 넉넉한 편의점 쉼터를 내어 주기도 합니다.
“제가 함양 사람이니까 주변에 다 친지들이 살아요. 작은 동네이니 모두 한 집 건너 아는 사이기도 하고요.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이런 낙이라도 있어야죠.”
‘아낌없이 주는 편의점’ CU함양한옥마을점은 이제 옆 동네 아이들도 놀러 오는 곳이 되었습니다. 옆 동네에서 미술강사로 교단에 서면서 아이들과 나눈 대화 덕분입니다. ‘선생님 편의점 한다’ 이야기하면 편의점 볼 일이 흔치 않은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진다고요. 유행하는 디저트도 사먹을 겸 선생님도 만날 겸 버스 타고 놀러 온답니다.
“애들도 좋아하지만 어르신 고객들의 CU 사랑도 한몫 해요. 사실 어르신들은 원두커피보다 다디단 믹스커피에 더 익숙하시잖아요. 그런데 저희 get커피 아메리카노를 한두 잔 대접하다 보니 ‘이 맛이다’ 느끼신 모양입니다. (웃음) 이 주변에 카페가 딱히 없기도 하고, 점주인 제가 생각해도 get커피는 정말 맛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점포 앞 벤치에는 60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원두커피를 마십니다. 옆에는 초등학생들이 앉아 라면을 먹고요. 그 모든 이를 작가들의 작품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사람과 예술이 한데 어우러지는 동네 사랑방, 점주님 부부가 꿈꾸는 정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니까
작년 4월, 점주님 가족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화가이자 함께 점포를 운영하던 남편이 폐암 4기 판정을 받은 것이죠. 전이가 시작되었으니 수술보다는 항암을 하자는 병원의 제안에 멀고 먼 서울 신촌까지 오가며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이홍경 점주님은 점포를 도맡았고요. 오후 5시에 출근해 새벽까지 점포를 지키며 몸도 마음도 무척 고단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점주님 부부를 살린 것도 역시 예술이었죠.
“항암 약이 잘 맞아서 많이 좋아졌지만, 무리하면 좋지 않으니 남편은 지금도 점포 일을 많이 하지 못해요. 대신 작품에 열정을 다하고 있죠. 하나라도 더 남기고 싶은 마음이라고요. 저 역시 ‘점포에서 작품을 만들자’ 결심하고 고객이 없는 시간에는 도자기를 가져와 그림을 그리며 버텼어요.”
생업의 터가 되어준 CU, 그리고 그 안에서 영글어가는 예술혼과 인연의 힘이 어쩌면 이홍경 점주님을 단단히 붙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편의점 운영 의사를 내비쳤을 때 “너무 멋지다”며 응원해준 아이들 덕에 이 일상도 일궈낼 수 있었다고요. 도자기 굽고 그림 그리며 아이들을 키워냈던 지난 시간도, 새벽내 점포에 윤을 내고 아침에는 발주에 몰두하는 지금도 소중한 삶의 풍경입니다.
“제 생에 장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웃음) 예전처럼 도자기에만 집중하지는 못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사는 냄새 만끽하면서 함께 예술세계를 꽃피워가는 재미가 있어요. 예술은 예측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삶도 예술이나 마찬가지죠. 우리는 다 예술가예요.”
인터뷰. 이홍경 점주님(CU함양한옥마을점)
글. 김송희
편집. 성지선
사진. 이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