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한낮, 어린이집 하원버스가 편의점 앞에 정차하자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이 편의점 안으로 이내 쏟아져 들어옵니다. “어서오세요!” 점주님의 인사가 친근한데도 왠지 서툰데요. 이곳 CU 일산IPARK서문점은 일본인 점주 나카가와 미치다카 님의 삶터입니다. 외국인 점주님 눈으로 본 한국 편의점의 풍경을 여기 풀어보려 합니다.
우리 동네 CU 점주님은 일본인
“한국살이 10년째지만 편의점에서 자주 쓰는 인사말 말고는 아직 한국말이 서툴어요.” 부지런히 상품을 진열하던 점주님이 반기며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상냥한 표정과 몸에 밴 친절이, 서툰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요. 열 맞춰 각 맞춰 상품을 정리하는 모습이 엄청나게 섬세하고 진지한데요. 상품 정돈에 이렇게도 열심인 이유를 묻자 점주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립니다. 이윽고 내민 번역 어플에는 한국어 두 글자 ‘당연’이 적혀 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0시간씩 편의점 운영을 챙기고, 점포를 정리정돈하고, 고객을 맞이하는 일은 나카가와 미치다카 점주님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한국말도 서툰 자신이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들과 어울려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차오르니까요.
고민 끝에 밟은 한국 땅
나카가와 점주님과 아내 강은실 님은 1999년 일본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10년 후에는 예쁜 딸도 품에 안았고요.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던 2011년,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본 동북쪽 도호쿠 지방에서 일본 지진 관측 역사상 최고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것입니다.
“딸 아이가 다섯 살 정도 됐을 때죠 아마. 대지진 이후로도 한 달 넘게 크고 작은 여진이 그치지 않았어요. 한국에 있는 아내 가족들이 난리가 났죠. ‘그냥 한국으로 오라’고 계속 전화가 왔어요. 너무 걱정 된다고요.”
지진 규모 9.1의 동일본 대지진. 그 여파로 쓰나미와 원전 폭발까지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등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점주님은 도쿄에 살았는데요. 도호쿠 지방에서 거리가 좀 되는데도 동네 집들이 부서지거나 무너져 내리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가족이 살던 아파트는 무사했지만, 그 소식을 들은 처가 식구들의 걱정은 더욱 커졌습니다. 결국 다섯 살배기 아이와 아내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점주님만 일본에 남아 기러기 아빠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오래 가진 않았어요. 2년 뒤 2013년에 제가 한국으로 들어왔거든요. 저도 아이가 무척 보고 싶기도 했지만, 딸이 어린 만큼 아빠가 옆에 있어줘야 할 때란 생각을 했어요.”
맨땅에 헤딩! 편의점에 뛰어들다
나카가와 점주님은 일본에서 잘 나가는 목수였습니다. 처음 한국에 와서도 토목기사로 일했는데요. 지금 CU가 있는 일산IPARK아파트도 점주님이 토목 공사를 맡은 현장이었습니다.
“여기 건설 현장이 끝나고 회사에서 평택에도 가서 같이 일하자고 했어요. 그땐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내가 여기 한 번 와보더니 편의점을 내면 좋겠다고 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 계약까지 하고 왔더라고요.”
아내의 과감한 행동력은 ‘일본 목수’ 나카가와의 새로운 출발로 이어졌습니다. 일산IPARK아파트 동문과 서문에 각각 CU를 열고 ‘한국 편의점주’로서 전혀 다른 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편의점은커녕 장사를 해본 적도, 한국말도 형편 없던 때라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었죠.
일본에서 한국으로, 목수에서 점주로
40대까지 토목기사로 살다 50대, 그것도 타국에서 무작정 편의점 운영에 뛰어든 나카가와 점주님. 힘들고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매일의 할 일을 에너지 삼아 달려온 지 어느덧 6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여전히 한국말은 서툴러도 하루 두 번의 상품 발주는 실수해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한글을 몰라 그림을 보며 발주했어요. 그래도 크게 실수한 적은 없어요. CU가 편의점 운영 시스템이 워낙 잘 돼 있고 담당 SC님들도 잘 알려주니까요. 참, 우리 스태프들에게도 고마워요. 저보다도 앞서서 많이 도와줬어요.”
말도 사람도 낯선 타국에서 편의점을 운영한다는 건 분명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점주님은 바로 그 사람들 덕분에 한국살이에 외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전합니다. 매일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편의점 근무를 마치고 운동을 한 뒤 하교하는 딸아이를 데리러 가는 일상의 평화. 내 가족과 함께할 수 있으니 고향 일본도 크게 그립지는 않습니다. “일본에 다녀온 지 6년도 넘었어요. 그러고 보니 한국에 온 뒤로 한 번도 안 갔네요. 오히려 아내랑 아이는 자주 가는데, 저는 매일 편의점을 지켜야 하고 특별히 갈 일도 없으니까요.” 어느덧 한국, 그리고 CU가 그의 삶의 단단한 터전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스며든 일상의 유대
CU 일산IPARK서문점은 대단지 아파트에 자리했습니다. 고객도 아파트 주민이 대부분이죠. 오픈 초창기 단골고객의 두 살배기가 벌써 초등학생이 됐다는데요. 어떤 꼬마 고객은 이사를 간다며 편지와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사탕상자를 마련해두고 꼬마 고객들이 올 때마다 몇 알씩 쥐어주곤 한다는 점주님의 얼굴에는 어느새 한국의 정(情)이 깊게 스몄습니다.
“사람들이 저만 보면 힘들지 않냐고 묻는데 저는 그 말이 이해가 잘 안 돼요. 한국말도 서툰 내가 한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해요. 아마 다른 회사에 다녔다면 일 못했을 걸요. 전화도 잘 못 받잖아요. 편의점은 내가 잘 배우면 혼자서도 운영할 수 있고, 여기 손님들도 스태프들도 다 친절하고 열심히 해요.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요? 하루 10시간 일하지만 무슨 일이든 그만큼은 노력해야 하는 거잖아요.”
삶을 지탱하는 부드러운 힘
CU 점주님 ‘나카가와 상’은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합니다. CU 일산IPARK서문점에서는 일본말 아침 인사 “오하이오 고자이마스”가 흔한 풍경이기도 하고요. “사람들이 일본인이 편의점 점주라고 하면 정말 신기해 해요. 근데 저도 신기해요. 내가 한국에서 편의점을 다 하고 있네? 지금도 신기해요.”
인생은 참 알 수가 없지요. 일본 건설 현장을 누비던 때만 해도 그가 한국에서 편의점주가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때의 삶도 지금의 삶도 점주님은 어렵거나 고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일엔 일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가족과 판화를 배우러 다니고.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입니다.
“특별히 미래를 계획해본 적이 없어요. 일본에 살 때도 목수 일을 하게 됐으니까 열심히 했고, 한국에서도 아내가 편의점을 계약했길래 제가 맡아 하게 됐고. 해보니 또 괜찮았어요. 나는 주어진 것을 살아갈 뿐, 특별히 성실하다고도 생각 안 해요. 당연히 하는 일이니까요.”
하루하루 순응하듯이 살아간다는 점주님에게서 오히려 단단한 삶의 심지가 느껴집니다. 편의점 CU와 함께하는 한국에서 2회차 인생이, 그의 말처럼 ‘마땅히’ 행복하길 바라봅니다.
인터뷰. 나카가와 미치다카 점주님(CU 일산IPARK서문점)
글. 김송희
편집. 성지선
사진. 안호성